21세기 들어 글로벌 정치와 기술은 상호 긴밀하게 얽히고 있습니다. 특히 인공지능 기술이 빠르게 확산되면서 각국의 정책이 자국 내 이해관계자뿐만 아니라 글로벌 차원의 수용자들을 고려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최근 주목받고 있는 개념 중 하나가 바로 ‘정책 번역(policy translation)’입니다. 단순히 언어적 번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한 국가나 지역의 정책을 다른 정치적·문화적 맥락에 맞게 조정하여 재구성하는 과정 전체를 의미하는 정치학적 개념입니다.
예를 들어, 스웨덴의 복지 정책을 남미 국가에서 채택할 때, 단순히 스웨덴의 법안을 스페인어로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신뢰 수준, 조세 제도의 투명성, 교육 수준 등과 같은 그 정책이 작동했던 맥락을 고려한 재해석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재해석은 단순한 기술적 작업이 아니라 정치적 행위입니다. 어떤 요소를 유지하고 무엇을 생략하며, 어느 정도까지 맥락을 조정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과정에는 항상 권력 관계가 개입됩니다.
특히 인공지능 기술이 정책 분석과 예측 도구로 활용되면서, ‘정책 번역’ 과정이 자동화되거나 데이터 중심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인간 정치 주체의 개입이 줄어들면서, 오히려 민주주의의 핵심인 ‘참여’가 후퇴할 위험이 생기고 있습니다. ‘정책 번역’은 단순한 수출입이 아니라, 권력의 확장 혹은 저항의 기회가 될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인 셈입니다.
또한, 정책 번역은 이주민 공동체나 다국적 기업, 국제 NGO에 의해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예컨대 한 이주민 공동체가 본국에서 경험했던 정책을 현지에서 비공식적으로 시행하며, 점차 제도화되는 사례가 보고되고 있습니다. 이는 ‘위로부터의 정책 이전’이 아닌 ‘아래로부터의 정책 재해석’이라는 점에서 민주적 정치 참여의 새로운 형태로 주목할 만합니다.
정책 번역을 둘러싼 또 하나의 중요한 논점은 ‘정책의 문화적 내재성’입니다. 특정 국가에서 효과를 보았던 정책이 다른 국가에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는, 단지 자원 부족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 사회가 가진 역사적 경험, 시민의 기대치, 정책을 수용하는 태도 등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를 고려하지 않은 정책 번역은 실패로 귀결되거나, 심지어 정책 수용국 내 갈등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인공지능이 아무리 정교한 알고리즘을 바탕으로 분석을 제공한다 해도, 인간 정치 주체의 해석과 참여 없이는 ‘정책 번역’은 완성될 수 없습니다. 기술이 주도하는 정책 번역은 이해관계자들의 맥락을 생략하기 쉽기 때문에, 오히려 정치적 투명성과 민주적 절차가 더욱 강조되어야 할 시점입니다.
향후 국제기구와 각국 정부는 정책 수입·수출 과정에서 ‘정책 번역 전문가’라는 새로운 유형의 공공 지식인을 양성하는 것이 필수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은 단순한 번역가가 아니라, 정치학, 문화학, 기술학 등을 넘나드는 융합적 역량을 갖춘 전문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정책 번역’은 앞으로의 국제 정치 질서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개념입니다. 이는 단순한 정책 수입이나 이식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주체성과 문화적 다양성, 그리고 기술적 중립성의 경계를 탐색하는 정치학적 도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글로벌 시대에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어떤 정책이 어떤 방식으로 ‘번역’되고 있는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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